<앵커>이번 APEC은 기업들에게도 더없이 좋
sans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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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2 22:20
매크로프로그램
<앵커>이번 APEC은 기업들에게도 더없이 좋은 기회였습니다. 대기업뿐만 아니라, 청년 스타트업 같은 중소기업들도 기술과 아이디어를 세계 무대에 알렸습니다.노동규 기자가 취재했습니다.<기자>APEC의 주무대 경주 보문단지를 달리는 이 셔틀버스, 운전자 없이 자율주행 중입니다.엑스포공원과 화백컨벤션센터 등 주요 행사장을 시속 30km대로 하루 7차례 오갔습니다.개발 회사는 7년 차 스타트업으로, 기업 두 곳으로부터 협업 제안 요청을 받는 등 국제행사 효과를 톡톡히 누렸습니다.[윤희성/오토노머스에이투지 팀장 : 많은 투자도 필요하고, 기술을 또 많이 알릴 기회가 필요하기 때문에 APEC 행사를 위해서 특별히 많은 시험 주행도 했고….]APEC 기간은 이렇게 초기 창업 기업과 청년, 사회적 기업에게도 기회였습니다.대기업 못지않은 기술과 아이디어, 무엇보다 열정으로 무장하고 자신들을 세상에 알렸습니다.지역 주민이 수거한 폐플라스틱으로 만든 공예품 등 사회적 기업의 제품이 APEC 공식 증정품에 포함돼 호응을 얻기도 했습니다.[허지용/헤렌코퍼레이션 상무 : 청년 사회적 기업들과 소셜 벤처들을 소개하는 자리고요. 나중에 성장했을 때 경제계 중요한 일원이 될 수 있는, 지역 기반을 둔 소셜 벤처들을 주로 섭외하고 소개했습니다.]APEC 회원국 가운데 열여덟 나라의 주류를 소개하는 전시장에서도 한국 소기업의 술이 주목받았습니다.20년 가까이 와인을 빚어온 경북 김천 농가의 산머루 와인은, 유명 프랑스 와인 맛에 익숙한 호텔 10년 경력 소믈리에도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유영진/워커힐 호텔 소믈리에 : 개인적으론 '어, 이렇게 맛있는 와인이?'… 솔직히 기대를 많이 하지 않았었는데 정말 깜짝 놀랄 정도로 밸런스도 좋고, 아주 맛있게 마셨던 와인 중 하나입니다.]국산 화장품과 길거리 음식을 앞세운 젊은 기업과 창업자들도 경주에 온 손님들의 눈과 입을 즐겁게 하며 존재감을 보여주는 데 성공했습니다.(영상취재 : 양지훈, 영상편집 : 김진원) 노동규 기자 laborstar@sbs.co.kr김종영미술상 2025 수상자 조각가 김주호서양미술에 주눅들지 않고평생 ‘우리것’ 찾아낸 뚝심늘씬한 8등신 대신 3등신대리석 말고 흙과 나무·돌로환하게 웃는 유쾌한 인물 조각호랑이·도깨비 등 친근한 소재강화도서 전업작가 33년째“자장면도 사치일 때 있었지만긍정과 희망 잃지 않아” 2025 김종영미술상 수상자로 결정된 조각가 김주호가 인천 강화도 작업실에서 자신의 작품들처럼 활짝 웃어 보이고 있다. <김호영 기자> 서울에서 차로 70km를 달려 인천 강화도의 한 산골 마을에 도착했다. 가는 길에 고인돌 유적지도 스쳐 지나갔다. 좁은 산길을 조심스럽게 올라가자 작은 집들이 보이고 굵고 기다란 나무 둥치들이 마당에 누워 있었다. 정원엔 아담한 돌조각이 가지런히 서 있었다. 조각가 김주호(76)의 살림집이자 작업실이다. 제17회 김종영미술상 수상자로 선정됐다는 소식을 전하자 “무슨 상이요?”라고 깜짝 놀랐던 그다. 첫 통화 후 며칠이 지나 만났지만 여전히 얼떨떨한 듯 했다. “지난 6월에 김세중조각상을 탔는데 5개월 만에 또 김종영미술상을 준다고 하니 무슨 영문인지 몰랐어요. 외국도 다녀오지 않고 교수 타이틀도 없이 그냥 작품만 만들어왔을 뿐인데 말이죠.”그러던 중 문득 K컬처 열풍 덕분이 아닌가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우리가 모르고 지내왔던 우리 것의 가치를 일깨워준 점을 인정받은 게 아닐까. 우리 것을 찾는 시대의 흐름과 제 작업이 맞아떨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되더군요.”그의 말처럼 그의 작품은 지독히도 한국적이다. 재료부터가 우리 주변에 널린 흙, 점토다. 그가 서울대 조소과를 다니던 1970년대는 서구 미술을 적극 수용하던 시기라 대리석과 브론즈가 유행이었다. 대리석 원조인 이탈리아 까라라 유학 열풍도 불었지만 그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브론즈나 대리석은 재료 값이 너무 비쌌어요. 재료 값을 감당하지 못해 작품 활동을 접는 경우도 많더군요. 그래서 저는 앞으로 끊임없이 계속 작품을 하려면 재료 값이 절대로 비싸서는 안 된다고 다짐했죠.”그렇게 흙으로 구은 테라코타는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서울에서 10여년간 미술교사로 지내던 그는 1992년 연고도 없는 강화도로 둥지를 옮겼다. 마흔 둘의 나이에 배고픈 전업 작가의 길을 선택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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